노동안에서의 십자가와 부활

“나자렛과 골고타언덕 위에서 그리스도의 직무(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그분과 일치하는 한에서)는 인류를 구원하며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Foto: Jos� Mar�a Moreno

2014, 2,10

하느님께서는 성 호세마리아를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노동이 가진 깊은 의미를 깨우쳐줄 수 있는 빛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의 노동 안에서 의미로 가득 찬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을 보셨습니다 . “전세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수행(완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전문적인 직업은 거룩한 과업이 되었으며, 이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구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1]

CIMA(나바라 대학교)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함을 의식합니다. 호세마리아 성인은 우리를 예수님을 우리의 전문적인 노동의 모델로 볼 수 있도록 이끕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단순히 모방되는 하나의 예가 아닌 우리 안에 구체화된 살아있는 모델이 됩니다. 그리스도처럼 노동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로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노동을 하여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일치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노동에 관해 고찰하고자 합니다. 깊이 없는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의 고찰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일상의 노력이 어떻게 그분의 십자가위에서의 자기양여와 그분의 부활과 승천에 결합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들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노동의 신비를 밝혀내어 우리가 그분과 일치하는 한에서 우리를 구원하며 성화시키는지 알도록 이끌 것입니다.

나자렛과 골고타 언덕 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으며, 그리고 그 사랑은 순종하는 아들과 딸에 대한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의 충만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조상은 불순종하였고, 이를 통해 고통과 죽음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성자께서는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어 그분의 의지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Foto: Sean Dreilinger.

골고타 언덕의 희생은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자유로이 우리의 본성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죽음과 고난을 받아들이심으로써, 그분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르시지 않고 그분을 보내신 분의 뜻을 따르는 가장 완전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4] 그러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그분의 자기포기는 그분 사랑의 순종과 동떨어진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분의 삶 전체를 통하여 드러난 충만하며 완전한 순종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 가장 완전한 표현이었습니다. “ 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5]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시던 해에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는 그분을 삼일 동안이나 찾아 다니신 후에야 성전에서 율법학자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분들께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6] 성경은 우리에게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 대한 그분의 순종과 그분의 노동 이외의 다른 숨겨진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7]그분께서는 목수였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나자렛에서 보내신 시간들을 밝혀줍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모님들께 순종하실 때와 요셉 성인의 목수일을 하셨을 때,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셨다는 것을 명료하게 밝혀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 남아계신 동안에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모님께서 당신 때문에 슬픔에 잠겨 당신을 찾아 헤매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3일간의(성삼일과 같은 의미에서의 3일) 고통을 받으셨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매일의 삶과 그분의 노동 안에서 그분의 의무를 수행하셔야 하는 것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Baytree Centre(영국)

나자렛에서의 그분의 순종은 결코 부족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골고타 언덕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순종과 본질적(내부적인 성격에서)으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순종은 그분의 모든 성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매 순간 거룩한 뜻과 함께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은 골고타 언덕에서 그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드러났으며, 나자렛에서는 매일 매일, 꾸준하게 목수로서 농기구를 만들고, 가구를 만드는 그분의 노동에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드러났습니다.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로서 목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고,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9] 나자렛에서 예수님의 삶에서의 구원에 대한 가치는 십자가와 분리돼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매일의 노동 안에서 사랑으로 당신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하심으로 수난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순종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골고타 언덕 위에서의 희생의 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주님께서는 나자렛에서의 목수 일하셨던 생활을 포함한 당신의 모든 삶을 바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순종 안에서 주춧돌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대성당의 아치의 정점에 있는 쐐기돌과 같은 것입니다. 이 쐐기돌로 말미암아 다른 돌들이 아치를 이루듯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평범한 일상에서의 하느님의 뜻의 성취는 십자가에서의 순종을 가능케 하는 모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의 평범한 일상은 십자가 안에서 완성이 되며, 이를 통해 그분의 나자렛에서의 삶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의 희생으로 성부께 들어올려집니다.

Foto: The dock.

우리 의무의 성취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11] 일상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과 같은 순종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 usque as mortem , [12]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기보다 죽음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 높은 경지의 의미를 갖는 것 입니다. 이는 다시말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매 순간 이와 반대되는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 자신의 뜻을 버리기 위하여 매 순간 투쟁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그분께서는 우리의 본성의 선하고 올바른 성향을 비추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를 올리브 산에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 라고 기도하실 때 성부께 바치십니다. [13] 우리안에서 우리의 의지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 무질서한 자기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당신 안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기애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일치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 각자는 바오로 성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14] “우리는 자신 전부를 바쳐야 하고, 완전히 금욕해야 합니다. 우리의 희생은 반드시 전번제가 돼야 합니다.[15] 라는 호세마리아 성인의 말은 어떤 숭고한 이상이나 야망의 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늘 우리를 이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로 열매를 맺어 당신께 돌려드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노동에서의 자신의 희생과 순종을 통해 우리의 달란트를 우리 자신의 과시나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닌 하느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로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어떻게 쓰길 원하시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뜻을 우리의 일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위의 물음은 다음의 글에 함축된 의미를 잘 이해한다면 간단히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하기를 바라신다. “정말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매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실천하십시오. 즉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십시오. [16]

하느님의 뜻은 매일의 의무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는 우리 의무의 수행으로 하여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뜻에 순종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그분께 하느님의 자녀로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우리의 개인적인 관심이나 성향을 포기하고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의 최우선적인 규범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Monkole (Congo)

Foto: Alexander Jung.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노동은 그 자체로 창조 때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바람직한 의무입니다. 따라서 이 의무를 방해하는 나태함은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의 직업으로 선택한 각각의 의무로써 구체화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직무가 있습니다. 이 직무는 성소의 한 양태로서 직업성소라고 할 수 있는 부르심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17] 이러한 직무 안에는 각자의 삶의 현실에서 오는 직업 윤리로서의 의무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근본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완벽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창조사업을 통해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로 이러한 직무의 수행은 하느님 뜻의 일부입니다. [18] 그리고 이러한 직무는 평신도들에게 있어 세속의 일 즉 자신의 직업활동을 함에 있어서 자신 각자와 가족, 그리고 사회의 선(善)을 위해 적법한 형태로 가능한 한 완벽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선(善)은 이성의 사유와 살아있는 신앙으로 비춰진 이성을 통해 확실하고 완벽하게 그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신앙으로 행동하는 믿음. [19] 때때로 이러한 삶은 매일매일의 작은 일들을 확고하게 하느님 뜻에 따라 변함없이 수행하는 영웅적인 모습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영웅적인 삶을 사는 이에게 당신의 거룩한 표지인 평화와 기쁨을 보상으로 내려주십니다.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20]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네. [21]

직무의 수행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정의라는 도덕적 의무를 엄격하게 수행하는 엄률주의자가 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에게 직무란 더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그 자체로 첫째 의무이며 하느님 뜻의 첫째 계명인 사랑 그 자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직업생활을 함에 있어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관대한 것아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음을 기억하며 가능한 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러한 직무를 수행해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자녀의 자선으로서의 사랑은 거룩함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왜 거룩함은 매 순간의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 요약되어 나타난다고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고와 피로의 가치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노동은 본질적으로 처벌 혹은 형벌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어 세상을 일구고 돌보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우리의 원조의 죄 이후에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24] 이러한 죄에 대한 처벌은 노동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닌 노동을 함으로써 오는 피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는 이 처벌을 구원의 도구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에게 직업을 택하여 노동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며, 이러한 일상생활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평신도의 정신으로 여러분은 각자의 일, 휴식, 기쁨, 매일의 어려움 그리고 끊임없는 노동에 대한 노고로 고달픈 여러분의 육체의 고통을 사제적인 정신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십시오. 이러한 봉헌은 거룩하며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살아있는 희생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25]

그리스도인은 노동을 함에 있어 희생하는 것을 피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분노를 일으키지 않으며, 권태로움 혹은 피로함 때문에 우리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 안에서 우리의 노고에 구원의 의미를 준 그리고 ‘그걸 지고 갈 두 어깨를 요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봅니다. [26] 오푸스데이의 창설자인 호세마리아 성인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훌륭하고 경험 깊은 조언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십자가를 여러분의 책상이나 연장 옆에 두십시오. 그리고 때때로 그 십자가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피로함에 지쳐있을 때 여러분의 눈을 예수님께 향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업무를 계속해나갈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27]

하느님의 아들 딸들은 실패로 인해 낙담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의 희망과 성취를 인간적인 성공에 두어서도 안 됩니다. 노동이 가지는 구원의 가치는 결코 세속적인 성공에 기반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즐겨 수행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목수일을 하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신 것과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심으로써 성부께 대한 당신의 순종을 완성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28] 라는 올리브 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의 정점은 이러저러한 인간적 계획의 완수함에 있지 않고, 죽기까지 고통 받으신 예수님의 아버지 뜻에 대한 온전한 자기포기에 있습니다. [2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직업 혹은 계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30] 인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분명히 드러내는 우리의 고통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사업에 동참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 입니다.

호세 마리아성인께서는 당신 자신의 경험을 통한 다음의 말씀을 통해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가장 확실히 드러내는 것이 곧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 손에 맡겨드릴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자주 우리 안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슬픔, 외로움, 반대, 중상모략, 조롱의 경험들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 모상을 닮은 틀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심지어 우리가 미치광이라고 불려지거나 어리석은 이로 보여지는 것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러한 고난을 받아들이며 사랑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고 버티기 어려웠던 이 시간, 땀과,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피하고 싶었던 이러한 정화의 시기를 받아들여 지나가면 우리는 주님의 가장 거룩한 각각의 오상을 받아들이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구원의 피로써 정화되고 강화되며 기쁨을 맛보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폭풍우 속에서 바위틈에 있는 피난처를 찾은 비둘기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안식처에서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위로하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고 그분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31] 부활의 빛

사도 바오로께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3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33]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의 부활과 승천으로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계십니다. [34] 이와 같은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순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십자가와 깊이 연결되어있는 그분의 나자렛에서의 노동에 대한 순종과 함께 우리의 매일의 수고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의 밝은 빛을 비추어주고 계십니다.

나자렛에서 당신의 시간을 보내시는 동안에도 예수님께서는 인간임과 동시에 하느님이셨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비록 그분께서는 부활에 이르기 전까지 영광스럽게 되시지도 영원 불멸하게 되시지도 않았지만 이미 요셉 성인과 함께 목수일을 하시는 동안 숨겨져 있던 그분의 영광을 영광스러운 변모의 순간에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목수로서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신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35] 성부의 외 아드님이셨고 당신의 거룩한 인성 안에 새로이 성령에 따른 삶을 살아가신 분이셨습니다. 매일의 노동을 하셔야 했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신 것처럼 가정과 사회에 충실하셨던 그분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늘에 오르시어 권능과 힘을 가지신 온 우주의 왕이며 주님이신 그분이십니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우리에게 그분의 나자렛에서의 노동, 순종 그리고 노고를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이끌어주고, 우리가 희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결코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오히려 바로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그러한 우리의 희생에 새로운 창조와 같이 찬란하며 환희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36] 우리도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매일의 노동 안에서 하늘과 땅에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38]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순종 때문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을 높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이끌려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우리의 무질서한 자기애를 포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며,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39]

만일 우리의 노동 안에서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천국의 상을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영광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40] 우리의 노동을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 자신을 성화시키시는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보호자 성령 덕분에 우리의 노동은 거룩하게 되고, 우리 자신은 성화되며 세상은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그 빛으로, 우리는 노동 안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서광을 발견하고 새로운 선의 서광을 찾는다. 그 서광은 분명히 노동에 따르는 노고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가 참여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선포일 것이다. 노고를 거쳐야 한다. 이 노고로써 이루어지는 십자가는 노동 자체로부터 솟아나오는 새로운 선(善)을 보여주고 있다.[41]

Yarani (Ivory Coast)

우리가 우리의 노동안에 즐겨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안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부활의 기쁨, 그리고 승천의 승리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 이 세상을 받았습니다 .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42]

바로 이러한 점이 하느님 자녀들의 노동 안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사랑이 갖는 의미가 됩니다. “여러분의 전문적인 직업생활을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하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 때문에 한다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사랑 안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비록 때때로 여러분이 오해, 불의, 배은망덕한 것과 같은 쓰디쓴 대접을 받거나,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눈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 지라도 여러분은 놀라운 결과를 여러분의 일의 성과 안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부, 풍성한 결실,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을 말입니다.[43] 미사의 희생과의 일치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 그분의 부활, 승천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관문인 파스카 신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나자렛에서의 그분의 노동은 이러한 신비와 일치하여 구원과 성화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수난, 죽음, 부활의 현존인 거룩한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삶 안에 구체화 됩니다. [44] “이 희생제사는 인류의 구원에 매우 결정적인 것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치 그 자리에 함께 했던 것처럼 그 희생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남겨 주신 다음에야 희생 제사를 바치시고 성부께 되돌아가셨습니다.” [45]

미사는 주님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여주신 순종의 정신으로, 부활의 새로운 삶으로 그리고 땅과 하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께 받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으로 우리의 노동을 가득 채워줍니다. 때문에 우리의 노동은 미사 때 봉헌되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노동 그 자체가 미사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24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24시간동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끝날까지 반드시 드려질 그리스도의 미사 안에서 기도하는 영혼들과 일치하는 여러분들 각자와 여러분들의 모든 노동과 일은 제대에서 드려지는 미사와 같이 완성됩니다.” [46] “그러므로 우리의 노동 안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됩니다.” [47] 하비에르 로페즈(Javier Lop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