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장의 묵상기도 주례: 우리의 나약함을 보여주시는 그리스도 (3)

(4번의 시리즈 중 셋 번째) 성주간의 의미를 되돌아보도록 하기위한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장의 묵상기도 주례를 위한 스크립트와 한글로 녹음한 파일입니다.

성 금요일의 전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위대한 신비를 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복음 속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유다와 함께 온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계시는 우리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카야파 대사제 앞으로 끌려가시어 신문을 받고 부당하게 얼굴을 맞는 모습을 봅니다.

시간이 지나, 빌라도 앞에서 군중은 소리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요한 19:6). 그 후, 예수님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셨고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의 아침,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군중들에게 “Ecce Homo – 이 사람을 보시오” (요한 19:5) 하고 말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입니다.

유명한 화가인 티치아노의 그림 중에서 ‘Ecce Homo –보라 이 사람이로다.’를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의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마지막 권리까지도 빼앗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취약함 통해서도 당신을 보여주시려고 원하셨습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받고나 마음속에 어두운 많은 사람들을 불 수 있습니다. 그들에서 그리스도께서 채찍질 당하심과 가시관이 씌워짐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을 묘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되풀이지 않고 독특한 모든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되었고 구원되었던 모든 인간이십니다…” Ecce homo!

지금 우리가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를 이루어 우리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까 각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홀로 괴로움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은 최근 격리되어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죽는 아픈 사람들을 볼 때 생각이 납니다. 이는 우리가 홀로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역시 외로움을 맛보셨던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 앞에 서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울부짖습니다.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십자가에서 그분의 울부짖음은 그분의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람들에게 명을 내리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잘못 다룬 예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고통은 신비로운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줍니다. 자연 재해로 인해 고통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무고한 사람들의 경우에서 잘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야기될 때, 하느님의 현존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를 도와달라고, 구원해달라고 청해야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죄의 모든 결과를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상처를 입으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를 보는 거울과 같기도 합니다.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그 상처들 속에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현존은 사심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사랑과 자애가 있는 곳은 어디나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을, 즉 예수님의 모습으로 행동하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병원에서, 노인들의 집에서, 가정에서 보아왔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분명하게 개인주의가 최후를 위한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해 보이는 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영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계십니다. 어떠한 방식에서든 간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역사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느끼도록 해주시고 사랑으로 다시 결실을 맺도록 해주십니다.

Ecce Homo (이 사람을 보시오.)라고 말한 장면은 우리가 많은 상황을 직면할 때, 더 확실하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자주 무방비 상태로 빠지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교황님께서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돌풍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상태에 대한 이 진리를 깨달아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 맺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형성하도록 도와줍니다.

복음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셨는지, 옷 벗김을 당하는지, 그리고 그분의 존엄을 뺏긴 것에 대해 말해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그 순간에, 우리의 주님께서는 시편의 한 말씀을 외치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6)

왜 모든 것이 이 고통으로 향하는 것인가요? 왜 십자가로 향하나요?

우리가 온전하게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장면은 우리에게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바로 십자가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권능을 보여주십니다. 실패와 패배를 맛보는 곳에서, 이해 없는 것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위대한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그 권능은 십자가를 사랑과 승리의 표현으로 변화시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십자가의 나무에서 우리가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은총의 어좌” (히브 4:16)를 발견하라고 전달합니다.

그것은 골고타 언덕에서 그리스도의 옆에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 중 한 사람의 체험입니다. 그 “착한 죄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어떻게 자신이 용서와 사랑을 받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우리의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루카 23:43) 십자가에서 우리는 “낙원”이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십자가와 낙원. 고문과 폭력과 수치의 도구로부터 십자가는 희망의 상징인 구원의 수단으로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 됩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의 자유로움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을 ‘십자가의 길’에서 언급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보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관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관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에 십자고상을 쥐고 간단하게 주님을 바라봄으로서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닫혀 있지 않고 넓게 열려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법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패배와 실패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가는 생명인 죽음, 생명을 주는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악과 죽음에 승리하신 하느님의 육화되신 사라지지 않을 그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창조되어, ‘새로운 창조물’이 됩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희망을 줄 수 있나요! 그 십자고상은 아마도 우리의 방에 걸려있거나 집의 다른 장소에 걸려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멈추어 그분에게 우리 내면의 상처와 피로와 걱정들을 보여드리며 그분 손에 맡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변화되어 안아주시는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의 희망으로 채워지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가족들과 친구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에게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분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팔을 넓게 벌린다면 우리는 희망의 확실한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성 금요일에 고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특별한 방식으로 감사를 드립시다. 이 기도와 보속의 시간인 사순시기와 성주간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매우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며칠 전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통회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을 실천하라고 조언하셨습니다.[1]

“만약 여러분이 고해성사를 들어줄 사제를 찾을 수 없다면,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진실을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저는 이것을 했고, 또 이것을 했고, 또 이것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여러분의 온 마음과 보속의 행위로 용서를 청한 다음 그분께 ‘이 시기가 지나면 고해성사를 드리러 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약속하십시오.”

성 금요일에 교회는 Lignum Crucis, 십자가의 나무로 주의를 기울입니다. 전례 안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경배하오며, 주님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오니 십자 나무 통해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십자가는 희망으로 세상을 채워줍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넓게 벌려 우리를 받아주실 준비를 하고 계심을 봅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해주기 위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거기에서 가장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봅니다.

티치아노는 Ecce Homo (이 사람을 보시오.)를 그린 후, “팔을 벌린 비탄에 잠긴 성모”를 그렸습니다. 오랫동안에 이 두 개의 그림은 같은 벽에 나란히 걸렸습니다. 고통이 우리의 삶에 들어올 때,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성모님께서 주님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 성모님께 십자가와 가까이 지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도 희망을 줄 수 있을겁니다.

[1] 가톨릭교회 교리서. 1451항, 1452항.